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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미션 로그

왕특기육) [루테] 닿지 못할 마음에게

by 뮤아넨 2015. 10. 13.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노력해도 되는 것과 시도조차 해서는 안 되는 것.
남기는 것과 없애는 것.
닿을 수 있는 것과 닿을 수 없는 것.

세상에는 상반되는 것 두 가지가 어우러져,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뒤집히는 것만이 유일하게 허락되었다.


루테는 투명한 유리창 위에 손을 올렸다. 가을이 느지막이 찾아와 밤의 바람은 겨울보다는 못하지만 유리창을 차갑게 식혔고, 차가운 유리창은 제 위에 올라간 그의 손에서 온기를 빼앗아갔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아직은 투명한 이 유리창위에도 하얀 서리가 올라올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창 너머로 건물 밖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할 게 뻔했다. 그래, 마치 베일을 쓴 것처럼. 유리창 너머로 방 안을 들여다보는 것도, 건물 밖을 보는 것도 불가능 할 것이다. 어두운 창에 비춰진 그의 얼굴은 평소의 모습과 달리 웃음도 생기도 없는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지친 표정. 억지로나마 꾸며내었던 가면조차 벗어버린, 평소엔 알 수 없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었다.

창에서 손을 떼자 손의 윤곽대로 서린 김이 천천히 사라졌다. 손에 온기에 달아올랐던 공기가 차가운 유리에 닿아 남긴 하얀 자욱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그렇게 스러졌다. 그걸 지켜보던 루테는 창에 깊은 숨을 불어 흰 도화지를 만들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그 공간이, 가장자리부터 슬금슬금 지워져 전부 사라지기 전에, 루테는 손가락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몇 자 적어 넣었다.

“...나는, 안 됩니다.”

마침표를 찍으며 한참이나 대고 있던 손가락 끝은 얼음장마냥 차갑게 되어 약간의 고통까지 가져왔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랐다. 세상엔 가질 수 있는 것과 처음부터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조절이 부족한 감정의 문제라 한다 해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한때의 환상이라면 모릅니다.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조금씩 꺼내는 진심을, 루테는 유리창에서 점점 지워져가는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인 것 마냥 고통스럽게 토해냈다.
그는 사랑의 저주를 앓았다. 누군가의 장난으로, 루테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지금은 그 마음이 식었지만 기억과 감상은 그대로였다. 평생 못할 줄 알았던 진심어린 사랑. 그 감상은 ‘위험하다’라는 것이었다. 가슴 속을 간질이고 울렁이게 하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우울하며. 조금 더 오래 닿고 싶어서 안달을 내고. 모든 감각이 그 사람을 향해 뻗어있는 그 상황은 저주라기엔 너무나도 현실감 있고, 그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라 위험하고 익숙했다.

...그래, 익숙한 것이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했지만 눈물 날 정도로 슬픈, 너무나도 슬픈 그 이름 모를 그것. 가슴 속 깊이 파고들어 평생 모를 줄 알았던 감정.

저주에 걸리기 이전에도, 그 사람을 이런 감정으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따스함을 알아버리면, 그것을 바라게 되어버립니다. 충족함을 알게 되면, 그것을 바라게 되어버립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바라지도 않을 것이죠.”

이번 저주에서 확실하게 깨달아버렸다. 그동안 이름 모를 감정은 사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은, 그에겐 위험한 것이며 바라선 안 되는 종류라는 걸. 채워지지 않아서 속이 바싹 마르다 못해서 타버린다 해도, 그에겐 허락될 수 없는 종류라는 것을.

천천히 습기가 차오른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고 있는 사이에도 유리창 위에 적힌 이름은 착실하게 지워져가고 있었다. 점점 작아진 공간은 이내 손톱만한 자리를 지키다 녹아내리는 눈처럼 자취를 감췄다. 이름이 사라졌지만 루테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이름이 있던 자리에 비껴 손을 짚으면서도, 눈으로는 그 흔적을 쫓았다.

“...우린 다릅니다. ...달라야합니다. 난... 당신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난, 겁쟁이니까....”

투명하지만 확실하게 겉과 안을 나누는 유리창을 보면서, 그 위에 올려진 손을 보면서 그가 쓰게 웃었다. 그래, 나는 이렇게 벽을 세우는 구나. 손을 내밀어도 닿지 않게, 닿을 수 없을 테니까....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테니까.

“우린 가야 할 길이 다를 겁니다. 내 길은... 당신과 다르겠죠.”

눈물이 나와도 참아냈다. 넘칠 듯 고인 눈을 천천히 깜빡인 그는 가면과 같은 미소를 덧씌웠다. 온기를 바래선 안 된다. 제 곁에 사람을 두어선 안 된다.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위험하다. 그의 목표를 위해 감수해야 할 위험을, 그 사람도 감당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지울 겁니다. 이 감정, 마음. 나는... 지금 당신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설령 그 전에 들키기 전에.... 채 피어나지 못할 마음을 뿌리째 뽑아버리겠다는 선언.

“그래도 평소처럼 웃으며 당신과 말하겠죠. 평소처럼, 처음부터 아무런 마음도 없었던 것처럼.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비록 속은 까맣게 타버려서, 무척이나 고통스러워도, 울고 싶어도... 평소처럼 속여 낼 것이다.

“참 다행입니다. 저는 표정을 숨기는 것이 능숙할 테니까요. 들키지 않을 거라 자신합니다.”

샐쭉 휘어지는 눈가와 입. 불안하게 흔들릴 눈을 감춰줄 웃음. 유리창에 비쳐진 제 모습에 만족한 루테는 또 아플 정도로 차가워진 손을 떼어내고 서둘러 등 돌렸다.

“...포기...하겠습니다. ...부디, 행복해주세요. 내 행복은... 당신의 행복이니까요.”

단단한 가면을 무장한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도 알고 있다. 한번 사라져버렸지만 그 위에 숨을 불어내면 또다시 이름이 떠오를 것이라는 걸. 하지만 그것을 애써 외면한 그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버린다면, 애써 만들어낸 가면이 무너질 테니까.

아무도 남지 않은 방. 그의 손이 올려졌던 흰 자욱은 천천히 제 모습을 지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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