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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가호

by 뮤아넨 2019. 8. 3.
벨루이제는 저보다 큰 요한을 올려다봤다.

처음에는 제 자신에게 몰려든 힘든 일에 괴롭기만 했다. 2년 전, 옳지 않은 일을 바로잡기 위해 직언을 올리다 제거된 아버지. 옳지 못한 일을 막기 위해 무력 충돌을 감행해 수배자가 된 자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미성년자인 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텅 비어버린 눈. 그 모든 것이 고통이었으며 슬픔이었다. 형제가 많은 것도 아닌, 그저 평범했을 뿐이던 가족이 왜 이렇게 흔들리고 무너져내린 건지, 어째서 어머니가 공허를 담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 이해해버린 아이는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저 앞에서 어머니와 닮은 눈을 한 친우를,
붙잡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 아닌 죽음을 예비한 그 눈. 생명을 끝까지 불태우는 것이 아닌 목숨의 길이를 재단해 한참이나 남아있는 생명의 심지를 미리 끊어둔 사람.
요한은, 세례자의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미래를 위해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 미약한 별빛들이 밤하늘을 수놓을 수 있도록 자신이라는 달을 숨겨버리겠다고, 미래를 위한 기초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듯 읊조리는 그가 서러웠다. 머리를 장식한 꽃이 생화던 조화던 어쨌거나 꽃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한 장식인 것처럼, 당신도 저 하늘에 떠있는 별일진대 어째서 제 빛을 가리우려 하는지. 어째서 혼자만 완전하다 하는건지. 벨루이제가 겪었고 배워온 미래를 위한다는 건 그런 방식이 아니었기에 더 울고싶어졌다.

요한, 미래를 위한다는 건 좀 더 다정한 것이에요. 툭, 하고 희생을 해버린 다음에 이것이 너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 말하면 그건 예언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미래가 이러해야 하니 따라야만 한다고 떠미는, 강요가 되지 않을까요? 다른 이를 위하는 건,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해요. 마치... 횃불을 넘겨주듯.

벨루이제는 최근에야 알아차린 진실을 떠올렸다.  직계-삼촌이자 장남인 앤드류 레우카스는 자신의 자식들-벨루이제의 사촌-에게 명령해 방계-아버지이자 차남이었던 딕슨 레우카스-의 자식인 벨루이제를 감시했었다. 레우카스 가문에 내려오는 오래되고 허황된 전설이었던 "호박빛 머리카락"을 방계가 타고 났다는 것을 못견뎌 했었다. 여기까지는 그도 알고있던 일이었다. 그저 삼촌이 저를 못견디듯 미워함을 알면서도 그 증오가 어째서 제 아비에게 향하는지는 몰랐지만, 그저 날때부터 느껴졌던 시선이기에 무시하고 말았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었다. 앤드류는 욕심은 많았지만 허술했고, 그가 시도했던 수많은 뒷공작은 조금만 살펴봐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튀어나왔다. 구시대적인 발상. 오래전에나 통했던 근친 결합. 직계로의 입양. 그 외에도 떠올리기 괴로웠던 계획들, 간계들. 그나마 이런 것을 모르고 지낼 수 있던 건 순순히 방패가 되었던 가족들 덕분이었다. 딸과 직계와의 접촉을 줄이고,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어른이 동행했다. 강제로 구시대적인 관습을 행하려 할때 딕슨은 스스로 독재자 앞으로 나아가 보호를 요청했었다.

...벨루이제가 경험한, 배웠던 미래를 위함은 다정한 것이었다.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힘들다 하여도 이기적이지 않은 것처럼. 다정히 감싸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끌어주는 것.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함께함을, 곁에 있음을. 서로 있음으로서 변할 수 있는 것.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서로의 존재 만으로도 변화가 가능하니까.

...세상은 혼자가 아니잖아요.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나요. 난 평생을 행복에 눈 가리우며 살아왔어요. 그리고 행복을 쫓으며 살아갈 거에요... 내가 그리는 행복 속에, 요한, 당신의 자리가 있다고 하면 망설여줄건가요? 내가 끝까지 당신을 기억한다 하면 망설일건가요? 난 당신을 막을 힘도 권리도 없지만, 기억만큼은 남길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이 모든 건 내 마음대로지만.

벨루이제는 모자의 질문을 떠올렸다. 어린 마녀여. 등불을 들고 어디로 갈 것인가. 그는 기꺼이 절벽에 올랐다. 바닷길로 갈 이들의 외로움에 두려워 하며 올라갔던 그 때와 다르게, 이제는 조금 다른 답을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절벽 위로 올라가 저 바다에서 외로이 있을 등불에게 여기에도 불빛이 있노라고 흔드는 것.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고. 여기로 오라고. 커다란 불을 피워두면, 그 불을 보고 오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혹여 불이 꺼지더라도 그 불빛을 기억하는 사람이 뒤이어 불을 붙여주지 않을까, 하는.... ...그래, 희망. 희망이라는 이름의 불을, 뒤따라 피워 올려줄 이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요한, 벨루이제는 슬퍼하지 않을거에요. 울지 않을거예요. 그저 조용히, 당신의 뒤에서... 그대가 지나간 길을 비추고 쫓으며, 당신이 가고 있을 길을 지켜보겠죠. 그 자리, 여기에서. 돌려주지 않아도 돼요. 애정이란 건 되돌려 받음을 계산하고 나누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그저 여기에서 있을게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반짝이는 별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찾을 수 있는 호박빛 별로. 뒤돌아보면 불타오를 횃불로서. 당신을 말리지 않겠지만, 가는 그 길을 비출 빛으로서....

벨루이제는 섪게 웃었다. 말릴 수도, 말려서도 안 되는 친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도회에서의 추억을 하나 더 쌓을 기회를 어찌 마다할까. 친우의 기억에 유령처럼 흐드러지는 기억이나마 남을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최선이니까,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것이 머나먼 길로 나아갈 친우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기원이자 자그마한 별 뿐일 그가 바랄 수 있는 가호였다.